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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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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inefabula 2016. 9. 22.


전날 부하직원들 앞에서 일처리 좀 똑바로 하라고 본부장에게 깨진 김민수 부장은 새벽까지 술을 진탕 마시고 아침에 겨우 일어나 회사에 출근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턱밑의 수염을 제대로 못 깎아 시커멓고 머리 감기는 포기해 뒤통수에는 새집을 지었다. 세탁해 놓은 와이셔츠를 입긴 했지만 불룩한 배 때문에 허리 부분은 팽팽해서 단추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해장 생각이 간절한데 나갔다가 본부장에게 걸리기라도 할까 봐 오늘은 점심시간까지 얌전히 앉아 있기로 마음 먹었다. 대신 점심 메뉴로는 시원한 국물의 쌀국수를 먹으려고 집을 나설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사내시스템에 접속했다. 로그인을 하자 공지사항에 '필리사이드 관련 전직원 주의사항'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굵은 글씨로 깜빡이고 있었다. 이 글은 지난번에 읽어 본 적이 있어서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필리사이드 관련해서 언론사나 정부기관 등에서 연락을 해 질문을 하면 절대 대답하지 말고 홍보팀쪽으로 돌리라는 얘기였다. 회사 외부사람에게도 이 일에 관해서는 입을 꼭 다물라는 내용도 있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러는 게 이해는 가지만 피해자나 가족을 생각하면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이 회사가 밥줄이라서 이러한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메일시스템을 들어갔다. 업무적으로 협조요청이나 부하직원의 보고 메일들이 잔뜩 눈에 띄었다. 그 중에 과음으로 몽롱해진 그의 정신을 확 깨워 주는 제목이 있었다.


'DJI 팬텀3 프로페셔널 30대 한정 50% 특별 할인'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사고 싶어 쇼핑몰에 들어가서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뺐다를 수십번은 했던 그 드론을 50%나 할인한다니. 사실 문제는 살 만한 돈이 없어서 와이프에게 용돈을 올려 달라고 사정사정했지만 이미 하나 있는데 뭘 또 사냐고 욕만 먹고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50% 할인이라니. 그것도 30대 한정이니 망설일 시간도 없이 바로 링크를 클릭했다.


"에이, 씨발"


욕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갖고 싶던 걸 싸게 사나 했는데 나타난 화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속은 것이다. 또 보면 화만 날 것 같아 메일을 얼른 삭제해 버리고 믹스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랬다. 그 사이 설치된 트로이목마는 컴퓨터 속에 조용히 숨어 자신이 움직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외에 메일을 보냈던 온성제약 직원 세 명 중에 두 명은 트로이목마를 설치했고, 한 명은 메일 제목을 보고 흥분했다가 아무래도 수상해 5분 정도 고민하다가 메일을 삭제했다. 어디에나 이런 의심 많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비해 메일을 여러 명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성공확률은 75%나 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같은 것이 다 이런 정보를 모아서 소비자의 취향에 딱 맞는 마케팅을 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앤더슨은 SNS도 안 하고, 편의점을 가든 마트를 가든 백화점을 가든 절대 포인트카드에 적립을 안 하는 것이다. 만원 구매할 때마다 겨우 10원어치 주는 포인트에 중요한 개인정보를 판다니, 100원을 줘도 팔 생각은 없다.



그날 퇴근한 앤더슨은 경유서버에 들어가 온성제약에 트로이목마가 설치되었나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세 명이나 친절하게도 트로이목마를 설치해 주셨다. 하지만, 아직 임상시험에 관련된 자료는 발견하지 못 한 모양이다. 밤새 보다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곳에 접속해서 원하는 자료를 찾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껐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검색된 결과는 없었다. 역시 이런 회사는 보안이 생명이라서 그런지 쉽게 찾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설치된 컴퓨터의 사용자가 사용하는 패턴을 저장해 두었다가 트로이목마가 그대로 따라서 시도하는 형태인데, 아무래도 이 약 문제가 세상에서 워낙 시끄러운 상태라서 직원들도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보기조차 꺼려 하는 모양이었다.



진통제 부작용에 관해서 연일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있어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본부장이 사무실을 둘러 보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 나른해져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김민수 부장을 발견했다. 만만한 화풀이 상대를 찾자 맹수처럼 그 앞으로 다가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이렇게 졸고 있는 거야?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해도 시원찮을 판에 잠이 와?"

"죄송합니다. 점심을 먹었더니 졸려서 그만"

"점심? 지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똑바로 좀 하자고. 나는 속이 새카맣게 다 타 버렸어."


본부장의 두더지잡기 기계도 아니고 스트레스 쌓일 때마다 두드려대고 가는 통에 회사가 지옥 같았다. 자신의 무거운 몸과 마음을 대신해 하늘로 날리고 싶은 드론은 돈이 없어 못 사고 있고. 이 나이에 받아 줄 만한 회사도 없으니 퇴사할 수도 없었다. 은밀히 임상시험 결과를 빼돌려서 공개해 본부장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졌다. 회사 문서관리시스템에 접속해서 필리사이드 임상시험 보고서를 다운받았다. 그리고, 그 파일을 열었다.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짐승만도 못 한 인간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이런 걸 팔다니'


김부장은 문서를 빼내려고 하다가 문득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인데 이 아이들 교육시키려면 회사가 살아 있어야 자신도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파일을 삭제하고 휴지통도 비웠다.

김부장이 조금만 더 진행했으면 일이 쉽게 풀릴 뻔 했지만 마음을 돌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트로이목마에는 이미 문서관리시스템에 접속하는 과정과 입력한 아이디, 패스워드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제 조용히 문서를 다운받아서 경유서버로 보내는 일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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