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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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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inefabula 2016. 9. 24.


회사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블랙라이더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얻은 결과물이 없어서 그런지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행상황은 알려야 하니까 전화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네, 형"

"앤더썬, 뭐 나온 건 없냐?"

"얘들이 보안을 철저하게 하나 봐요. 잘 못 찾는 것 같네요."

"하긴 이런 게 유출되면 회사가 휘청거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겠지. 너무 연락이 없어서 확인차 전화해 봤다. 근데 뭐 추가적으로 시도할 만한 방법은 없나?"

"더 강한 방법이 없진 않은데, 그러다가 그쪽 보안프로그램에 걸리기라도 하면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차단될 수도 있어서요."

"그래,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네. 뭔가 찾는대로 연락해라."

"네."


기다려 보자고 얘기는 했지만, 앤더슨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결과가 나오겠지 하며 위안을 삼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다림이라는 것은 설레임과 초조함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는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경유서버에 뭔가 들어온 것이 없나 확인했다. 있다. 정확하게 필리사이드 임상시험 보고서. 바로 다운받아서 열어 보았다. 깨진 파일이라며 열지 못 했다. 텍스트 에디터로 열어 보니 DRM이 걸린 파일이었다. Brute Force Attack으로 시도해 보면 열 수도 있겠지만 며칠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일단은 자신의 컴퓨터에서 Brute Force로 암호를 풀도록 프로그램을 돌려 놓고, 경유서버에는 그 문서를 여는동안 DRM 프로그램이 복호화한 결과를 트로이목마가 빼내서 복호화된 문서를 가져오도록 명령을 입력해 놓았다. 이제는 둘 중에 먼저 완료되는 것만 기다리면 된다. 또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 왔다. 끝을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에서 목표가 보이는 기다림으로 바뀌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기다림은 기다림이다. 긴장이 풀리면서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통마늘을 얇게 썬 후에 기름을 두르고 달군 프라이팬에 넣었다. 마늘이 갈색빛이 돌 때까지 볶은 후에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지 않고 바로 뜯어서 올렸다. 밥을 넓게 꾹꾹 눌러서 밥알이 하나씩 분리되도록 했다. 적당히 볶아졌을 때 소금과 후추를 뿌려 조금씩 먹어 보면서 간을 맞춘 후 불을 껐다. 마늘볶음밥을 그릇에 옮겨 담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탁에 차려 놓았다. 마늘의 향긋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한데 이런 분위기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아이폰을 꺼내 마룬5를 틀어 에어플레이로 전송하자 Payphone이 스피커로 흘러 나왔다. 좋은 음악과 좋은 향기가 어우러져 즐거운 분위기에서 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배불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기다림으로 지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토요일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니 배는 고픈데 뭔가 해 먹기는 귀찮았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은 후에 깔끔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 입고 제과점에 가서 빵을 사 가지고 들어와 우유와 함께 먹었다. 이번 주말은 혜진이 친구들과 1박2일로 여행을 가서 데이트도 없고, 라이딩도 없어서 온전히 혼자서 이틀을 보내야 한다. 예전에는 주말을 혼자서 빈둥거리면서 잘도 보냈는데, 겨우 2주 데이트 좀 했다고 갑자기 혼자 보내는 주말 이틀이 길게 느껴진다는 게 우스웠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먹고 나니 돌려 놨던 컴퓨터가 생각났다. 혹시 운이 좋아 암호를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니터를 켜고 프로그램을 보니 여전히 열심히 뭔가를 시도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건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경유서버에 들어가 보았다. 여기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제가 금요일이었으니 김민수 부장이 컴퓨터를 끄고 퇴근했다면 그안에서 활동하는 트로이목마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출근하는 월요일쯤에나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유서버에 문서가 올라와 있었다. 다행히도 김부장이 휴일근무수당을 받으려고 할 일도 없는데 회사에 나와서 영화를 보느라 컴퓨터를 켜 놨기 때문이었다.

문서를 다운받아 열어 보니 이번엔 열렸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설마 했던 것들이 모두 사실로 기록되어 있었다.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와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끝까지 읽어 가면서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문서를 다 읽고 한참이 지나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블랙라이더가 떠올랐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앤더썬, 좋은 소식 있나?"

"소식은 있는데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네요."
"왜, 못 찾겠나?"

"찾아서 문서를 봤는데, 이 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네요."

"내용이 어떻길래?"

"형, 메일로 보낼께요. 읽어 보세요."

"그래. 얼른 보내 봐라."


메일을 보내고 한 시간쯤 후에 블랙라이더로부터 전화가 왔다.


"앤더썬, 그 분도 보고 놀라시더라.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 꼭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

"뭘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저번에 착수금 넣은 건 확인했나?"

"그러셨어요? 몰랐네요."

"가끔씩 확인도 하고 그래라. 조금 있다가 잔금도 입금할께."

"네, 고마워요. 근데 트로이목마는 이제 지워도 되겠죠? 유출된 것 알게 되면 누가 그랬는지 찾으려고 난리날 텐데."

"그냥 놔 두면 걸릴까?"

"혹시라도 찾아서 추적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지죠."

"그럼 바로 지워라. 이 정도 자료만 충분할 것 같다."

"네. 그런데 이 자료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

"네. 알았어요."


경유서버에 접속해서 트로이목마가 스스로 삭제되도록 명령을 입력하고, 대포통장을 확인했다. 천만원! 며칠 전에 착수금으로 천만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다가 조금 후에 화면을 다시 열어 보자 그 위에 2천만원이 추가로 입금되었다. 그새 잔금이 입금된 모양이었다. 한 번에 3천만원이라니. 일주일만에 자신 연봉의 반이나 되는 돈을 벌다니, 가슴이 벌렁벌렁거렸다. 이 돈으로 뭘 살까 이것저것 떠올리면서 한참 신나 있었는데 블랙라이더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앤더썬, 너 추적당하지 않게 은밀하게 메일 보낼 수 있나?"

"그거야 어렵지 않죠."

"내가 메일주소 보내 줄 테니까, 그 문서 그 메일주소로 다 보내 줘라."

"네."


잠시 후에 메일을 확인하자 메일주소 몇 십 개가 있었다. 메일주소의 도메인명을 보니 지금까지 익히 보던 언론사들이었다. 아마도 기자들의 메일주소인 것 같았다.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으니 언론에 터트려서 국민들의 여론으로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앤더슨은 추적 불가능한 메일서버를 통해서 문서를 첨부해 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작성하고 최종적으로 보내려고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자신이 사회를 위해 큰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키를 누르는 손끝에서 짜릿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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