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파인더

18

by romainefabula 2016. 10. 16.

골치 아픈 온성제약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자 앤더슨은 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동안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온 정신을 집중하다가 그 일이 끝난 후에 느껴지는 공허함 같은 거였다. 회사에 출근해 촛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 이과장이 커피를 먹으러 가자고 불러서 따라 나섰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커피점에서 각자 사원카드로 결제하고 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김대리, 너 오늘 왜 이렇게 멍하니? 요 며칠은 그렇게 눈빛이 살아 있더니."
"제가 그랬어요?"
"너 어제 잠 못 잤어? 혹시 좋은 야동이라도 받은 거야? 그런 거 있으면 공유 좀 하면서 살자."
"에이, 아니예요. 그런 게 있으면 저도 좀 보여 주세요."
"니가 구해다가 줘야지. 나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그런 걸 친히 구하러 다녀야겠니? 젊은 애들이 알아서 찾아다가 딱 바쳐야지. 내가 어렸을 땐 안 그랬다."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요즘은 그런 게 있으면 친구들끼리 SNS로 바로 공유하죠."
"그래, 그러니까 니 친구들이 너한테 공유하면 나한테도 좀 공유하라고."
"제 친구들은 고상해서 그런 거 관심 없지만, 혹시 오면 공유해 드릴께요."
"고상한 척 하기는. 그냥 순순히 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으냐? 근데, 김대리 너는 취미가 뭐였지? 자전거 탄다고 했지? 그거 비싸지 않니?"
"싼 것부터 비싼 것까지 다양하죠. 왜요? 싸이클 타 보시게요?"
"아니, 나는 그렇게 땀 흘리는 건 별로 관심 없다. 태블릿이나 사서 갖고 놀고 싶은데 마누라가 용돈을 안 올려 줘서 요즘 돈 안 쓰고 열심히 모으고 있다. 그래서, 요새 내가 담배도 끊고 매일 점심을 맛없는 구내식당에서 먹는 거야."
"그것 때문에 담배도 끊고 건강에는 참 좋네요."
"놀리지 마라."

이때 이과장에게 회의가 있다는 전화가 와서 먼저 올라갔다. 앤더슨은 이때 자신도 사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때마침 두둑한 현금도 있었다. 그동안 자동차를 사고 싶었지만 현재 월급으로는 모아서 사기에는 시간이 걸려서 매일 사지도 못 하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차피 혼자만 타면 되고, 요즘 상황으로 봐서는 둘이 탈 수도 있고, 그러니까 굳이 자동차가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운전하는 재미가 있는 차를 갖고 싶었다.

앤더슨은 블랙라이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앤더썬."
"형 혹시 중고차 딜러 아는 사람 있어요?"
"왜, 차 사게? 돈 생겼다고 너무 막 쓰는 거 아니야?"
"전부터 사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샀던 거죠. 돈 많이 안 쓰려고 중고차 사려는 거예요."
"넌 참 나를 알게 된 게 행운이야. 나야 각계각층에 다양한 사람들을 알고 있지. 중고차 딜러면 내가 경찰 때 도와 준 놈이 있긴 하지. 사고 싶은 차는 정한 거냐?"
"미니 쿠퍼 S요."
"그거 너무 좁지 않냐? 알았다. 내가 그 차 있나 한 번 물어 볼께."
"고마워요, 형."

잠시 후에 블랙라이더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니 쿠퍼S 있단다. 2011년식인데 무사고에 얼마 안 타서 거의 신차 같대."
"그래요? 좋네요. 가격은 얼마 정도 하는 거예요?"
"처음엔 2천 불렀는데, 내가 아끼는 동생이니까 눈탱이 치면 죽는다고 했더니 천7백으로 내리더라."
"생각보다 훨씬 저렴하네요."
"그놈 마진 하나도 안 남는다고 투덜대더라.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근데 언제가 괜찮냐? 넌 회사 다니니까 토요일이면 되지?"
"네."
"그럼, 내가 토요일에 약속 잡아 놓고 주소하고 시간 알려 줄 테니까 가서 사라. 나는 토요일에 늦잠 자야 되니까 너 혼자 가도 괜찮지?"
"네. 고마워요."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고맙기는."

토요일에 중고차매장에 도착해서 파란색 미니쿠퍼S를 전날 미치 찾아 두었던 현금으로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애플매장에 들러 위시리스트에 있던 맥북에어도 구입했다. 집에 도착해 차를 주차장에 대고 맥북에어 박스를 들고 내리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원래 자신이 사고 싶은 것들은 비싸지 않을 것들을 시간 간격을 두고 사야 인생이 즐겁다고 하는데, 막상 목돈이 한꺼번에 생기니 그렇게 간격을 두면서 사다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서 하루에 모두 사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기쁨이 시들해질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세상을 모두 산 기분이었다.

집에 가 박스를 열자 매끈하게 생긴 맥북에어가 보였다. 맥북에어를 켜서 이것저것 초기설정을 한 후에 화면이 떴다. 생생한 화면과 깔끔한 디자인에 빠릿빠릿한 반응까지 더해져 금방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설치되어 있는 프로그램들을 실행해 보기도 하고, 더 이상 맥OS에서 할 것이 없어지자 인터넷에 들어가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미니 동호회 카페에 가입해서 자동차 관리팁들을 열심히 읽었다. 한참동안 화면을 들여다 보았더니 눈도 아프고 더 이상 할 것도 없어서 끈 후에 함께 산 백팩에 넣었다. 백팩을 메고 거울에 비춰 보자 디자인도 깔끔하고 자신과 제법 잘 어울렸다. 내일 데이트 때 이렇게 메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앤더슨은 새로 산 차를 몰고 나가 혜진과의 약속장소 근처에 주차를 한 후 11시쯤 맥북에어가 든 백팩을 메고 그녀를 만났다. 먼저 얘기한대로 브런치카페에 들어가 푸짐하게 식사를 했다. 음식을 기다리는동안에는 둘이 웃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음식이 나와 한입 먹고 놀라며 맛있다는 얘기를 한 후엔 음식을 정신없이 입안에 넣고 열심히 씹느라 얘기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날 때쯤 앤더슨이 말문을 열었다.

"정신없이 먹느라고 얘기도 제대로 못 했네요."
"그러게 말이예요. 너무 맛있어서 얘기하는 걸 잊어 버렸어요. 여기 정말 맛있네요."
"역시 블로그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건 틀리지 않나 봐요. 다들 맛있다고 하더니."
"진혁씨 여기 전에 와 보셨던 것 아니었어요? 어떻게 와 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맛있는 데를 찾으세요?"
"예전엔 블로그에 올라 온 글만 보면 대부분 맞았는데, 요즘은 돈 받고 글 올려주는 곳이 많아서 그렇지 않죠?"
"네. 저도 그런 글 보고 친구들하고 갔다가 실망한 적이 많아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몇 가지 팁이 있어요. 일단, 올린 사진이 너무 각도도 좋고 사진도 잘 찍고 거기에 손님이 하나도 없으면 의심을 해 봐야 돼요. 거기에 글 디자인도 프로의 냄새가 나고 처음부터 끝까지 칭찬일색이면 거의 홍보업체 작품이라고 봐야 되죠."
"어머, 맞아요. 저도 그런 글 보고 갔어요."
"믿을 만한 글은 디자인이나 사진이 일단 좀 서툴러요. 그리고, 내용도 지극히 자신의 일상이 묻어나요. 남자친구와 갔다던지 하면서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남자친구 사진이나 손이 나오기도 하구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게 뭔가 불만을 쓰는 거예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데 음식들 중에 뭐 하나는 맛이 좀 별로라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하고, 가격이 좀 비싸다거나, 종업원이나 사장님이 불친절하다고 해요. 이런 글들은 직접 가서 먹어 보고 솔직하게 썼을 확률이 높죠. 검색결과에 이런 글들이 여러 개 나오면 그 집은 맛집일 확률이 아주 높아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다음부터 이 방법 꼭 써 먹어야겠네요."
"이미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방법도 있긴 한데요."
"뭔데요?"
"음식점 주차장에 차가 가득차 있거나, 음식점 자리에 손님이 꽉 차 있는 거요."
"하하. 네, 그렇죠."
"우리 영화 볼까요?"
"예매했어요? 어떤 영화요?"
"예매한 건 아니구요. 노트북 갖고 왔는데 커피숍 가서 같이 볼까 하구요."
"그래요? 좋아요."

둘은 커피숍 구석자리에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은 후에 음료를 마시며 영화를 보았다. 앤더슨은 전에 커피숍에 갈 때마다 애플 마크 달린 노트북으로 이렇게 영화 보는 커플들을 볼 때마다 내심 부러웠는데 자신이 직접 하게 되니 버킷리스트의 항목 한 개를 지우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본 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나왔고, 앤더슨은 주차장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녀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기는 주차장인데요."
"네, 여기서 차 타고 가려구요."
"차 사셨어요? 공돈이 이번엔 많이 생겼나 봐요."
"아니예요. 중고차인데 할부로 샀어요. 여기 있네요. 자 여기로 타세요."
"미니네요. 와 예쁘다."
"조금 좁은데 괜찮죠?"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전부터 길에 다니면서 미니 보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타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제 출발할까요?"
"네. 출발~"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따라 일산까지 드라이브를 즐겼다. 트인 공간에 있을 때와는 달리 단둘이 공유하는 공간에서 더군다나 미니라서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더 가까워 마음의 거리까지 가까운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밝게 웃고 자신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이야기 > 파인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0) 2016.11.05
19  (0) 2016.10.22
17  (0) 2016.10.09
16  (0) 2016.09.29
15  (0) 201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