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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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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inefabula 2017. 6. 11.

맥북에어의 전원을 켜고 Wi-Fi를 검색하니 무선공유기 하나가 잡혔다. 이것을 선택해서 접속하려고 하자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형, 이거 공유기 비밀번호가 뭐예요?" 앤더슨이 블랙라이더에게 물었다.
"어, tpdnjfgh" 블랙라이더가 대답했다.

앤더슨은 무선공유기에 접속한 후 빠르게 프로그램을 띄우고 이것저것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클랙했다. 잠시후 파일을 열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나머지 두 사람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교수와 블랙라이더는 그 목소리가 김호준비서관의 것이라고 금방 알아 차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앤더슨을 쳐다보았다.

"이거 챙겨 올 시간이 있었나? 지난번에 도망 나오면서 폭파하는 바람에 같이 사라진 줄 알고 이게 어디 있었던 거냐?" 블랙라이더가 물었다.
"컴퓨터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백업이 습관이라서요. 언제 만들어 놓은 문서나 프로그램이 날아갈지 모르니까 항상 백업이 생활화되어 있죠. 이 파일도 그 컴퓨터 말고 외부 서버에 백업해 놓았던 걸 다시 받은 거예요." 앤더슨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때 이교수가 이야기했다. "그럼 우리에게 아직 무기가 남아 있었던 거네요. 어떤 무기가 있는지 어서 들어 봅시다."
"예."하고 대답한 후에 앤더슨이 음성파일 하나를 실행했다.

"예, 각하."
"아까 회의 때 김실장이 얘기했던 거 말야. 그거 실제로 진행해 보는 게 어떨까?"
"어떤 얘기 말씀이신지..."
"보행자들 좌측통행을 우측통행으로 바꾸자는 얘기 말이야."
"아 그거 말씀입니까?"
"그래. 말 되지 않아? 사람들이 좌측통행을 하니까 자꾸 좌파가 되는 것 같지 않아? 좌파들이 많아지니까 우리가 뭘 하든 자꾸 트집이나 잡고 피곤해 죽겠어. 우측통행을 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생각이 바뀌어서 우파가 되겠지. 안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논리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좌측통행을 하다가 갑자기 우측통행을 하면, 좌측통행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대로 좌측통행을 하다가 우측통행하는 사람들하고 정면으로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괜한 혼란만 일으키고 별 효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단 1%라도 효과가 있으면 우리는 좋은 거지. 1%가 선거의 당락을 좌우할 수도 있는 큰 차이야. 그리고, 어차피 우리야 어디 걸어 다녀? 차 타고 다니잖아. 보행자들이 부딪히든 말든 뭘 그렇게 걱정이야?"
"예, 알겠습니다. 다음 회의 때 적극 검토하도록 지시해 놓겠습니다."
"그래. 손해 볼 것 없는 거야. 한 번 추진해 봐."

셋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블랙라이더는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이교수와 앤더슨도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블랙라이더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 앤더슨은 블랙라이더가 앉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음성파일을 실행했다.

"예, 각하."
"여기 휴지 좀 갖고 와."
"휴지 말씀입니까? 갑자기 휴지는 왜..."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졌어. 아줌마는 휴지를 왜 안 채워 놓은 거야. 드라마 보다가 왔는데 비데로 씻고 건조를 틀었는데 너무 오래 걸리잖아. 결정적인 장면이라 꼭 봐야 되는데 지금 못 보고 있잖아. 지금 바로 숨도 쉬지 말고 뛰어 와. 알았지? 출발!"
"예."

세 명 모두 참지 못 하고 큭큭거리며 웃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다가는 대통령이 밑도 닦아 달라고 할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며 웃다가, 앤더슨이 다음 음성파일을 실행했다.

"예, 각하."
"환경부장관 임명은 어떻게 됐어?"
"워낙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서 야당에서 절대 안 된다고 버티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니,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난리야. 언론에 나온 거 보니까 다 별 거 아니더구만. 그깟 몇 억 받은 게 무슨 대수라고 그래."
"제가 보기에도 문제 없어 보이는데 야당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동생이 나한테 얼마나 잘 하는데, 장관 자리 한 번 앉혀 줘야지. 당대표한테 전화해서 꼭 임명되도록 하라고 해."
"저번에도 전화했는데 어렵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이번에도 또 어렵다고 하면 나한테 좀 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지난번 각종 비리와 환경에 관한 배경이 전무해 전문성 부족으로 임명 철회 요청이 쇄도했지만 임명을 강행해 시끄러웠던 환경부장관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야당을 비롯해 여당 내에서도 임명을 철회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끓었는데도 왜 그렇게 강행을 했는지 궁금했던 일이었는데 이런 어이 없는 이유에서였다니 다들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걸 뿌리면 어떨까요?" 앤더슨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데, 어디서 보내게? 여기서 보내면 IP 추적해서 이 집 찾아 오는 거 아니냐? 저 놈들 또 쳐들어 올까 봐 무섭다." 블랙라이더가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당연히 여기선 안 보내죠.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가야 될 것 같은데요. 형 운전 좀 해 주세요." 앤더슨이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조심해야 해요. 이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 하면 우리는 계속 숨어 다녀야 해요. 그때까지 절대 잡히면 안 되요. 알죠?" 이교수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앤더슨이 대답했다.

앤더슨은 맥북에어를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섰고, 블랙라이더도 장비가방을 들고 차로 향했다. 차를 타고 CCTV가 없는 길을 골라서 약 1시간 정도 가서 길 양편으로 2층 건물의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앤더썬, 이제 어떻게 할까?"
"Wi-Fi 연결해야죠. 저쪽으로 이동해서 주차해 주세요."
"아, 저 커피숍 들어가서 인터넷 하게?"
"아니요. 형 망원카메라로 저 커피숍 카운터 앞에 붙어 있는 Wi-Fi 비밀번호 좀 쭉 당겨서 찍어 주세요."
"임마, 그 정도 돈도 없어서 도둑 인터넷을 쓰냐? 그냥 내가 커피 사 줄 테니까 들어가자."
"아니에요. 저기 들어갔다가 CCTV에라도 찍히면 어떻게 해요. 우리 모습은 밖에 드러내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안다, 알아.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그러냐? 알면서 모른 척 한 거다. 어디 보자. 비밀번호가 뭔가 보자." 블랙라이더는 얼렁뚱땅 자신의 무지를 숨기면서 얼른 사진을 찍어 비밀번호를 앤더슨에게 보여 줬다.

커피숍의 공유기와 거리가 멀어 신호가 약했지만, 앤더슨은 인터넷에 접속해 모든 언론의 기자들에게 음성파일을 메일로 전송했다. 몇 시간 후부터 언론에는 환경부장관 임명에 관련된 뉴스속보가 줄을 이었다. 지난번 무기도입비리 폭로 이후 잠잠해졌던 여론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음성파일 유출로 인해 온갖 욕을 들은 김비서관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혜성일보 기자가 받은 메일 발신지 IP 추적은 어떻게 됐어?"
"지방 커피숍을 찾아서 거기서 메일 발신한 시간대의 CCTV 동영상을 받아 왔습니다."
"얼른 틀어 봐."
"예."하며 직원이 동영상을 틀었다.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세 테이블에 모두 5명이 있었다. 두 테이블에는 두 명씩 앉은 사람들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는 남자 한 명이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무언가를 키보드로 입력하고 있었다.

"저 새끼다. 얼른 찾아서 잡아 와. 쥐새끼 같은 놈 그렇게 숨어 다니면 못 찾을 줄 알았지?" 김비서관이 소리쳤다.
"저기 가서 신원 확인하고 소재지 찾고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알아. 가용한 모든 자원 동원해서 빨리 잡아 오라고. 야, 다들 빨리 움직여."

직원들이 커피숍으로 가서 사진을 보여 주며 주변을 탐문해서 사흘만에 노트북을 하던 남자를 잡아 왔지만 아무리 노트북을 뒤져 보고 심문을 해도 메일을 보낸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김비서관은 그 시간에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들이 헛탕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비서관이 이렇게 앤더슨 일행을 찾아서 헤매는 동안, 앤더슨과 블랙라이더와 이 카페 저 카페를 돌아 다니면서 음성파일을 하나씩 언론에 뿌렸다. 이틀 간격으로 계속 터져 나오는 대통령의 어이 없는 비리에 분노한 전국의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저녁뉴스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촛불집회를 뿌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블랙라이더가 앤더슨에게 말했다.

"앤더썬, 우리가 심지에 불을 붙여서 이렇게 큰 촛불이 타오르고 있는데 훈장이라도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
"형은 뭐 그런 걸 바라고 이런 일을 한 거예요? 국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지."
"아, 이놈 봐라. 또 멋진 척 하는 거 봐라. 서울대 수석 입학하고 교과서로만 공부했다고 하는 놈만큼 재수 없다."
"대학 들어갈 때 교과서만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오, 이거 한 대 때려 줄 수도 없고."
"헤헤, 농담이에요. 요즘 서울대 들어가려면 죽어라 사교육 받아야 되죠. 나는 훈장 필요 없고 그냥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어요. 김비서관이 우리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니, 꼼짝 않고 집안에만 숨어서 있으려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잘 생기지도 않은 니 얼굴 하루 종일 보려니 나도 지겹다."
"형, 거울 좀 보고 그런 말을 하세요. 형이 그 정도면 저는 어떻겠어요?"
"너야 당연히 행복하겠지. 어딜 가면 이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하루 종일 볼 수 있겠냐?"
"정권이 바뀌면 더 이상 우릴 찾지 않겠죠?"
"저 나쁜 놈들을 싹 쓸어내면 우리에게도 자유가 찾아 오겠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은 앤더슨은 생소한 단어라도 외우려는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자유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   끝 -


romaine.fabula@G메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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