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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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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inefabula 2016. 9. 27.


앤더슨은 메일을 보내고 한동안 앉아서 자신이 한 일이 세상에 어떤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 궁금했다. 모두의 관심을 받고 온성제약이 항복을 할까, 아니면 용케 빠져 나가서 책임을 면할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확히 말하면 설레임반 설레임반이었다. 그러다가 이미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에 걱정해 봐야 뭐가 달라지겠냐는 생각이 들어 침대 위에 누워 전자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을 보다 잠이 들었고 2시간 정도 맛있게 잔 후에 일어났다.

재미있는 주말예능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TV를 켜서 채널을 돌리다가 화면 아래의 자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온성제약 태아기형유발 진통제 임상시험 보고서 유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문서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기자도 특종이라고 직감하고 빠르게 방송에 공개한 모양이다. 자막에는 '잠시후 온성제약 임상시험 보고서 뉴스특보'라는 자막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폰을 켜고 다음앱을 실행했다. 여기도 역시 메인화면에 온성제약 관련 특보가 제일 위에 올라가 있고 실시간검색어 1위도 온성제약이 차지하고 있었다. 기사중 제일 위의 기사를 눌러 들어가 보았다. 보고서의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온성제약 필리사이드 충격 임상시험 보고서 유출
그동안 필리사이드의 태아기형유발 관련하여 임상시험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현재의 사태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느껴 위로금만을 제공하겠다고 하던 온성제약의 임상시험 보고서가 유출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임상시험 중에 임신 사실을 모르고 참여한 한 여성이 기형아를 출산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되었던 임상시험 보고서에 빠져 있던 내용이라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려고 고의로 이같이 일부 내용을 누락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봐도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문서를 어디서 얻었다는 얘기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았다는 얘기라도 있었으면 기분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 베스트댓글을 보았다.
'나쁜 놈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추천수:21450
'설마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구나.'   추천수:18726

댓글을 보고 앤더슨도 추천을 눌렀다.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세상이 이렇게 떠들썩해지고 피해를 보고도 사죄를 받지 못 해 힘들어하던 약자가 힘을 얻게 된 상황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그 문서 내가 찾을 거라고 소리치며 돌아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합법적이지 못 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거라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차마 떠들어 댈 수는 없는 입장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하지 못 해 답답해했던 사람의 마음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무릇 큰 일을 할 사람은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혼자서 이 즐거움을 만끽하고 밖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해야 한다.

즐거움을 공유할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라도 축하하기 위해 집앞 슈퍼에 맥주와 안주를 사러 나갔다. TV에서 나오던 온성제약 관련 특보를 보시던 주인아주머니가 맥주와 안주를 가져와 카운터 위에 올려 놓는 앤더슨에게 말을 건넸다.


"나쁜 놈들, 그렇게 아니라고 하더니. 이번에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무슨 일인데요?"

"그 온성제약인가 뭔가 하는 회사 있잖아. 자기네 약 먹고 기형아 출산했는데 자기들은 몰랐다고 하던 놈들. 문서가 유출되었는데 지들도 다 알고 있었다잖아."

"그래요? 그거 참 잘 됐네요."


돈을 내고 산 물건을 받아 들고 나오면서 앤더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했다고 말하지 못 하는 답답함도 있지만, 알면서 모른 척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다음주 내내 어딜 가든 이런 얘기가 나올 텐데 다음부터는 웃지 말고 끝까지 완벽한 연기력을 선보여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와 TV을 켰다. 이미 아는 내용을 자꾸 보기가 싫어서 미드 채널로 돌렸다. TV를 보면서 맥주와 안주를 먹고 있는데 블랙라이더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세상이 들썩들썩 하는구나'

'네. ㅋㅋ'


형을 만나 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 만나자고 할까 하다가 괜히 술김에 떠들다가 남들이 우리들이 했다는 걸 알게 될까 봐 이내 마음을 접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맥주도 달콤쌉싸름한 게 목으로 술술 잘 넘어갔다.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셔서인지 잔뜩 취한 그는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 10시가 다 되어서 눈을 떴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은 후에 제과점에 가서 빵을 사다가 우유와 함께 먹었다. 숙취 때문인지 얼굴도 붓고 정신도 맑지 않았다. 카페인이 들어가면 정신이 날까 싶어 커피를 한 잔 마실까 생각하다가 휴일인데 맑은 정신으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되어 그냥 또 TV를 켰다. 그런데, 화면 아래에 '잠시후 온성제약 경영진 기자회견'이라는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들이 항복하고 사죄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맑아졌다. 조금 앉아서 기다리자 화면에는 기자회견장이 보였고 잠시후 온성제약 경영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아 가져 온 종이를 꺼내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제 온성제약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유출되어 온 대한민국이 떠들썩했습니다. 회사 내부에서 검토한 결과 그 문서는 저희가 작성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저희를 음해하려는 의도로 만든 위조문서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위조된 문서에 속지 마시고, 사실 확인 없이 위조된 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저희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 언론사는 모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습니다."


앤더슨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당연히 사죄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블랙라이더에게서 전화가 왔다.


"앤더썬, 너도 뉴스 봤나?"

"네. 이것들이 미친 거죠?"

"이래서 내부고발자가 필요한 건가 보다. 문서 주인이 위조라고 하니 불법으로 빼낸 우리들은 반박할 수가 없네. 이것들이 사실 아는 직원들 입 다 막아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하겠다는 것 같은데. 저 사악한 놈들 입을 틀어 막아 버릴 방법 없을까?"

"글쎄요. 저 문서가 위조라고 하면 뭘 갖고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 답답해 죽겠네."

"형, 방법이 하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트로이목마가 지워지지 않았어야 할 텐데."

"그래? 뭔데?"

"일단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찾게 되면 알려 드릴께요."

"니가 알아서 잘 하겠지. 지금 열 받아 미칠 지경이니까 빨리 좀 찾아봐라."

"네."


앤더슨은 얼른 컴퓨터를 켜고 경유서버로 가서 트로이목마 삭제명령을 모두 취소했다. 다행히 어제와 오늘이 휴일이라서 그 직원들이 쓸데없이 휴일출근만 하지 않았으면 트로이목마가 삭제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나서 경유서버에 자신이 생각한 명령을 입력해 놓았다. 이제부터 또 하루의 초조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이것만 잘 되면 그들에게 멋진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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