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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17

by romainefabula 2016. 10. 9.


밤늦게 홍미애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도착한 이대기 기자는 조심스럽게 대문안을 들여다 보았다. 방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고 마당쪽의 불만 하나 켜져 있었고, 마당에는 그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도시에서 온 분위기의 한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이기자가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흠칫 놀란 그녀가 얼른 담배를 바닥에 버려 끄고 대문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머, 누구세요?"
"명성일보에서 나온 이대기 기자라고 합니다. 여기 명함 있습니다. 좀 받아 주세요."

명함을 받아 든 그녀는 급히 다시 돌려 주며 외쳤다.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어서 가세요. 안 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기자의 육감으로 그녀가 홍미애라는 느낌이 왔고, 뭔가 숨기려고 하는 눈치였다.

"제가 무단으로 집으로 들어간 것도 아닌데요. 그냥 제 소개만 했는데요. 이런 일로 경찰이 오진 않죠."

용건도 모른 채 나쁜 사람으로 몰아부쳤다는 생각에 홍미애의 얼굴에 미안하고 무안한 표정이 살짝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화를 한발짝 더 진전시켰다.

"저, 홍미애씨죠?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얘기는 어느 정도 듣고 왔습니다."
"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어요?"

이기자는 온성제약에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육감과 그것을 뒷받침했던 익명의 제보가 모두 사실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손님을 이렇게 대문밖에 세워 놓고 얘기하실 거예요? 저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는데, 이렇게 서 있으니까 다리가 아프네요. 좀 들여 보내 주세요."

그녀는 문을 열어 주며 들어 오라고 했다. 마당쪽에는 마땅히 앉을 만한 곳이 없어 둘은 나란히 마루에 걸터 앉았다. 이기자는 편안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여기는 부모님집인가 봐요?"
"네. 급하게 떠나려니 생각나는 곳이 여기 밖에 없었어요. 시골분들이라 벌써 주무셔요."
"꼭 시골분들만 그러시는 건 아니구요. 저희 부모님도 연세가 드시니까 초저녁잠이 많아지셔서 일찍 주무시더라구요."
"아, 그런가요?"
"홍미애씨,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이 말을 듣자,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알아 보는 상황에 당황하고 경계하던 그녀의 긴장이 풀리고 두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는 미애씨를 도와서 세상에 진실을 밝히려고 왔어요. 온성제약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미애씨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고 얘들이 나쁜놈이라는 것도 잘 아시잖아요."

훌쩍이던 그녀가 이 말을 듣고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애씨가 지금 두렵고 어딘가로 피하고 싶다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미애씨의 이름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잘 숨겨서 진실을 세상에 밝히려고 해요. 그러려면 미애씨가 사실을 모두 얘기해 주셔야 하고 저는 지금부터 녹음을 할께요. 미애씨는 제가 묻는 질문에 사실대로만 대답해 주시면 되요. 괜찮으시죠?"
"네."

홍미애는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일들을 기자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온성제약의 임상시험에 참여했던 그녀는 그 기간동안에는 진통제를 먹어도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자신의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고 10개월을 채우고 출산을 했는데 기형아가 태어난 것이었다. 계산해 보니 임신 초기에 자신이 온성제약의 임상시험에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되어, 회사에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보상을 요구했지만 자신들의 약에는 문제가 없고 그녀가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라며 발뺌했다. 힘들게 키우던 아이는 1년을 넘기지 못 하고 죽었고 미혼모였던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로 아기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혼자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온성제약의 필리사이드를 먹은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출산하면서 약의 문제점이 세상에 알려졌고, 앤더슨이 임상시험 보고서를 언론에 뿌리자 다급해진 그들이 그녀를 찾아와 돈을 주면서 조용히 숨어 있으라고 한 것이다. 그동안 모른 척하더니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뒤늦게 사과도 없이 돈으로 입막음하려 하는 그들의 모습에 그녀 또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사건에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아 두려움과 분노에 떨며 부모님집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모두 마치자 가슴 속에 쌓아 두었던 응어리가 풀린 듯 그녀의 표정은 평온해졌고, 담배에 불을 붙여 크게 들이마신 다음 길게 연기를 뿜어내며 자신의 힘든 과거도 같이 날려 보내는 것 같았다. 이기자는 그녀에게 용기내 줘서 감사하고 꼭 사실을 밝혀 한을 풀어 주겠다고 말한 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는 차에 타자마자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대기야. 너 어디냐?"
"편집장님, 특종입니다. 온성제약 이것들 다 쓸어 버릴 거예요. 내일 조간 헤드라인 비워 두세요."
"어쩐지 오늘 너 거동이 수상하더라. 근데 뭘 잡은 거야?"
"제가 올라가면서 얘기할께요."
"그래, 밤이니까 운전 조심해서 와라."
"네!"

다음날 명성일보의 헤드라인은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온성제약 기형아 출산 임상시험 보고서, 사실로 밝혀져'

기사내용에는 홍미애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이 정확하게 세상에 밝혀지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온성제약은 경영진들이 기자회견에서 모든 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며 피해자 전원에 대해 적극 보상에 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어나서부터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고 점심을 먹고 들어와 오후 업무를 하는 동안 내내 앤더슨은 이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궁금해서 수시로 아이폰으로 다음뉴스를 보고 있었다. 온성제약의 사죄 기자회견 발표 뉴스가 뜨자 너무 신나 자신도 모르게 옆의 이과장에게 크게 소리쳤다.

"과장님, 온성제약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대요."
"그래? 이것들 아니라고 그러더니 결국 사실이었네."

앤더슨은 자신이 모두 찾은 거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실이 이번에도 답답했다. 하지만, 정의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 이런 답답함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승리에 도취해 혼자서 싱글벙글하던 앤더슨에게 시큐보이스로 전화가 왔다.

"앤더썬, 수고했다. 이번에 완전히 뒤집혀서 질 뻔 했는데 니 덕분에 이겼다."
"이번엔 진짜 이긴 것 맞죠? 또 뭔가 거짓말이라고 오리발 내밀진 않겠죠?"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냐? 걔들이 다 잘못 했다고 사과했잖아."
"그러면 다행이구요. 오늘밤부터는 발 뻗고 잘 수 있겠네요. 요 며칠동안 밤에 잠이 안 와서 힘들었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어찌나 분한지."
"오늘 맥주 생각이 간절하네요. 같이 마시면 안 되겠죠?"
"우리 술 마시다 흥분해서 다 얘기할까 겁나서 술맛도 없을 것 같다. 이번엔 조용히 각각 자축파티로 대신하자. 그리고, 다음에 내가 한 잔 살께."
"네. 그러시죠."

앤더슨은 퇴근길에 집앞 슈퍼에 들러 자축파티에 사용할 맥주와 안주를 샀다. 이번에도 앉아서 TV를 보고 계시던 아주머니는 뉴스에 나오는 온성제약에 분노하며 앤더슨에게 동의를 슬쩍 구했다. 앤더슨도 역시 처음 듣는 뉴스인 척하며 온성제약을 향한 분노의 대사를 내뱉으며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집으로 가며 자신의 연기가 날로 는다고 혼자 감탄하며 킥킥거렸다.

집에 도착한 앤더슨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아이폰 에어플레이로 아델의 Hello를 틀고 맥주를 마셨다. 이렇게 멋진 노래를 부르는 아델이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야기하다 웃으면서 내는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언제 들어도 노래 분위기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맥주와 노래의 분위기에 취한 그는 식탁을 정리하고 이를 닦은 후에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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