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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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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inefabula 2016. 9. 16.


앤더슨은 지하철이 이촌역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이 10분 밖에 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회를 가는 것이라서 늦는다고 못 들어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바른생활 사나이의 이미지에 갇혀서인 것도 같고, 회사생활하면서 시간을 지키는 습관이 들어서인 것 같기도 했다. 평소 출근 같았으면 항상 비슷한 스타일의 옷과 신발이라서 특별히 튀는 색깔만 아니라면 그냥 잡히는대로 입고 나왔겠지만, 어제 퇴근 후에 데이트를 위해서 산 셔츠와 바지, 슬립온을 오늘 아침에 입고 보니 벨트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여러번 바꿔서 해 보다가 이렇게 늦고 만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매표소 앞에서 혜진씨가 환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힘을 내 그쪽으로 달려가 그녀 앞에서 멈춰 섰다.


"이렇게 안 뛰어 오셔도 되는데."

"미안해요.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요. 저 안 늦었어요?"

"음, 지금 11시 정각이네요. 안 늦으셨어요. 축하해요."

"다행이네요. 표 사야죠. 여기서 사면 되는 거죠?"

"제가 미리 사 놨어요. 오늘은 제가 풀코스로 안내할께요. 그냥 잘 따라 오기만 하세요."

"좋네요. 남자들은 데이트 때마다 뭘 먹고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던데, 오늘은 마음 편히 있으면 되겠네요."

"에이, 그래도 데이트인데.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죠."

"참, 그렇죠. 이제 들어갈까요?"

"네. 이쪽으로 가요."

"저 미술쪽은 잘 모르는데 어떻게 봐야 될까요?"
"저도 잘은 몰라요. 친구 따라 몇 번 다니다 보니까 그림을 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기분도 좋아져서 가끔 기회될 때면 나오는 거예요."

"그래도 저보다는 많이 알겠죠."

"저기 오디오가이드 있네요. 저걸로 설명 들으면서 보면 이해하기가 좀 편할 거예요."


둘은 전시장 입구에서 대여료와 신분증을 내고 오디오가이드를 받아 든 후에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앤더슨은 전에 사진 찍으면서 공부한 구도를 떠올리면서 보니 그림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에는 정신을 집중하기가 힘들어 오디오가이드의 설명을 들어 보기도 하다가, 그녀는 어떤지 옆모습을 힐끗거리며 보았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 가까이 가서 꼼꼼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앤더슨의 눈과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러더니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제가 괜히 이런 곳에 오자고 했나 봐요. 재미 없으시죠?"

"아니예요. 전부터 전시회 와 보고 싶었는데 주위에 남자들 밖에 없어서 와 볼 수가 있어야죠."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한 시간 30분 정도 전시회를 관람하고 둘은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출구 앞에는 도록을 비롯해 작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기념품들을 하나씩 살펴 보다가 앤더슨이 좋다고 느꼈던 그림이 들어가 있는 휴대폰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이 휴대폰케이스. 이 그림 참 좋았는데 케이스로 만드니까 괜찮네요."

"정말 예쁘네요. 진혁씨 휴대폰 모델이 뭐였죠?"

"아이폰 5S요."

"아이폰 5S용 여기 있네요. 제가 오고 싶었던 전시회 같이 와 주셨으니까 감사의 뜻으로 선물할께요."

"이렇게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걱정 마세요. 그냥 '고맙습니다'하고 받으시기만 하면 되요."

"네, 고맙습니다."


기념품점에서 나오니 어느덧 1시가 다 되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박물관 내에 있는 푸드코드로 가서 점심을 먹은 후에 밖으로 나왔다. 박물관 앞의 공간이 시원하게 열려 있고 거기에는 호수도 있었다.


"진혁씨 걷는 것 좋아하세요?"

"네. 막 부딪치고 열심히 달리는 운동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걷거나 싸이클 타는 건 좋아해요."

"그럼 잘 됐네요. 제가 걷는 걸 좋아해서 오늘 여기서 많이 걸으려고 준비 다 하고 왔거든요."


그러고 보니 앤더슨은 약속시간에 급하게 도착해서 어두운 전시장에 있고 배가 고파서 급하게 밥을 먹느라 그녀의 옷차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정장스타일로 깔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만 보았고 지난번 데이트에도 그보다 약간 캐주얼한 정도였는데, 오늘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하고 느낌이 달랐는데 옷차림 때문에 그랬나 봐요. 혜진씨 청바지에 운동화 입은 모습은 처음 봤네요."

"이상하죠? 너무 막 입고 나온 것 같아요."

"아니예요. 이런 옷이 웬만해선 소화하기 힘든데 혜진씨는 잘 어울려요."

"그래요? 고마워요. 사실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아무 얘기 안 하셔서 별로인가 하고 계속 걱정했었거든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어요. 예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덕분에 자신감도 얻었으니 이제 산책 출발해 볼까요?"

"네. 출발~"


회사에서 그녀의 차려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편하게 차려 입은 캐주얼한 모습을 보니 마치 남들은 모르는 그녀만의 비밀을 혼자 아는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둘은 천천히 석조물정원과 미르폭포 등을 나란히 걸어다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까이 걷다 보니 가끔씩 그녀의 어깨와 그의 팔이 부딪히기도 했는데 닿을 때마다 놀란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한글박물관 표지판이 보였다.


"어머, 한글박물관도 여기 있네요. 한 번 가 볼까요?"

"네. 그래요."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한참을 뛰어가던 그녀가 뒤돌아보더니 빨리 오라고 손짓했고, 그도 신이 나서 달려갔다. 박물관에 들어가니 어린아이들과 엄마들이 많이 보였다. 아이들 사이를 조심히 다니며 한글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살펴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도 한참 걷고 한글박물관까지 계속 걸었더니 다리가 살짝 아파 왔다.


"혜진씨 저기 카페에서 조금 쉬었다가 움직여요. 오랜만에 걸었더니 다리가 좀 아프네요."

"너무 오래 걸었죠? 신나서 돌아다니다 보니 깜빡 하고 있었네요. 진혁씨 뭐 드실래요?"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이것도 사실려구요?"

"아까 풀코스라고 얘기했잖아요."


커피를 받아서 자리에 마주 앉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진혁씨는 주말에 취미생활 같은 것 하세요?"

"네. 싸이클동호회하는데 모임에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라이딩에만 나가요. 그 모임이 없으면 주말엔 거의 집에 있어요."

"그럼 혹시 내일 약속이 그 동호회 모임이예요?"

"네. 오랜만에 타는 거라 잘 탈지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무슨 약속이신가 궁금했는데 동호회를 하셨구나."


동호회 모임이라는 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며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그가 일요일에 약속이 있다는 말에 그 이후 내내 혹시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면서 그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다. 그 이후에는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싸이클은 얼마나 비싼 걸 타는지, 얼마나 멀리까지 달려 봤는지, 다른 사람들처럼 쫙 달라붙는 민망한 옷을 입고 타는지, 싸이클을 타고 가 본 곳 중에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자신도 한 번 타 보고 싶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가 조금이라도 웃긴 대답을 하면 까르르 웃고 때론 박수를 치며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보다 한층 밝아진 그녀의 모습에 처음엔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둘이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분위기가 좋아진 둘은 한글박물관 전시실과 기념품점을 더 돌아보고, 저녁까지 먹은 후에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도 역시 풀코스를 책임지기로 한 그녀가 모두 계산했다. 앤더슨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자신이 정해 놓은 걸 끝까지 지키려고 고집 피우는 그녀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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