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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26

by romainefabula 2016. 12. 24.

"혹시 나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나요?"
"아니요. 저도 정신없이 쫓기다가 방금 여기에 와서 무슨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당황스럽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좋을까요? 음, 우선 이번에 휴대폰 해킹은 내가 의뢰했던 거예요. 그리고, 지난번에 온성제약 건도 제가 의뢰했던 거고요."
"두 가지 일에 무슨 연관이 있으신데 저에게 사건을 의뢰하셨던 건가요?"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 모두 나하고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요."
"직접적으로 관련도 없는 일인데 그렇게 많은 돈을 주신 거예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이나고 있는 일이고, 나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니까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돈의 가치라는 것이 상대적인 거라서 똑같은 액수의 돈도 어떤 사람에게는 크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크지 않게 느껴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럼, 그 돈이 굉장히 많으신 분이신가 보네요. 그래도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들도 보통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는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하고,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악착같이 노력하지 않나요?"
"하긴 그렇긴 하죠. 내가 소위 성공한 부자라는 사람들을 만나 봐도 대부분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는지 혈안이 되어 있긴 하더군요. 하지만, 가끔씩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죠. 나도 그런 쪽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우리나라 부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모아서 자녀들에게 물려 주려고 하는데, 자제분들이 이런 곳에 돈을 쓰시면 반대하지 않으시나요?"
"허허, 부자들에게 반감이 많은 것 같군요."
"반감이라기보다는 사회 분위기나 시스템이 강자에게 유리하게 맞춰서 돌아가기 때문에 약자들이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것에 대해 걱정이 되어서요.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부자들과는 다른 분인 것 같긴 하네요."
"그렇게 봐 주니 고맙네요. 호칭은 교수님이라고 해 주세요. 전직 교수여서 그런지 그게 익숙하네요. 그리고, 나는 재산을 물려줄 자녀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돈을 악착같이 모으려는 의지가 별로 없네요."
"네? 그럼 부인께서 이렇게 돈을 쓰시는 걸 반대하지 않으시나요?"

이때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블랙라이더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앤더썬아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이가? 교수님 가정에 관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노?"

그러자, 이교수는 오른손을 들어 블랙라이더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후에 대답을 시작했다.
"앤더슨 혹시 2년 전에 있었던 세원호 침몰사건 기억해요?"
"그럼요, 대한민국에 그 사건 모르는 사람이 있겠... 그럼, 혹시?"
말을 하던 앤더슨이 어떤 생각에 이르렀는지 말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이교수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이교수는 비장한 표정으로 이내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천천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 그래요. 그 배에 내 아내와 두 딸이 승선했었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죽었어요. 그때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나는 강의가 있어서 나중에 출발하기로 하고 아내와 딸들은 먼저 출발해 세원호를 탔다가 그런 일이 생겼어요.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했는데 굳이 배를 타고 천천히 즐기며 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서 어쩔 수 없이 보냈어요. 내가 끝까지 비행기를 타라고 우겼으면 어땠을까, 내가 강의를 취소했으면 함께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아직도 하고 있어요.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쉽게 그렇게 되질 않네요."
"죄송합니다. 아픈 가족사를 꺼내게 해 드려서."
"아니예요. 나와 일하게 되었으니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었는데 조금 일찍 아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럼 혹시, 세원호 사건으로 정부나 사회의 문제를 사회에 알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네, 그래요. 그전에도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도 있고 친구들과 얘기할 때는 이런 문제를 고쳐야 한다는 얘기는 했지만 직접 행동으로 옮겨 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세원호 사건으로 가족들을 잃으면서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죽어가는데도 무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커녕 어떻게든 숨기려는 정부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마음 먹게 되었죠. 그래서, 처음으로 경찰에 있던 저 화순이를, 아니 블랙라이더라고 해야 하나? 난 화순이가 정감 있고 좋은데. 어쨌든 화순이를 먼저 소개 받아서 퇴직시키고 흥신소라는 위장 직업을 갖게 했죠. 그런데, 화순이가 일을 하는데 컴퓨터로 중요한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앤더슨에게 일을 맡겨 보니 능력도 있고 정의감도 있어서 이번 사건까지 맡기게 된 거예요. 미리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뒤늦게 알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저도 교수님처럼 말로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떠들면서 막상 행동으로 옮기진 못 했는데 이 일을 하게 되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국정원이 쫓고 있으니 앤더슨은 당분간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겠네요. 회사에는 적당히 핑계를 대도록 해 놓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국정원이요? 아까 저를 쫓던 사람들이 국정원인가요?"
"그래요. 쟤들이 쫓기 시작했으니 당분간 몸을 숨기고 여기에 있으면서 내 일을 도와 줘요.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 밖으로 나가도 괜찮을 거예요. 나갈 때쯤엔 여기까지 오느라 부서진 차도 모두 수리해 드리죠."
"네, 감사합니다. 그럼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면 제가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보기보다 성질을 급하시군요. 여기까지 쫓겨 오느라 정신 없었을 텐데 분위기에 적응도 할 겸 오늘은 푹 쉬도록 해요. 할 일은 내일 아침식사 후에 알려 줄께요. 그럼 쉬어요."
"네,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교수는 복도 끝으로 걸어가 문 앞에 달린 정맥인식 출입통제 시스템에 손을 대자 문이 열렸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의 일들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자 앤더슨은 긴장이 조금 더 풀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블랙라이더와 눈을 마주치자 반갑게 말을 걸었다.

"형 이름이 화순이었어요?"
"난 그 이름 마음에 안 드니까 그냥 블랙라이더로 불러라."
"왜요? 정감 있고 좋은데, 화순이형."
"그만 해라. 나 아니었으면 너 여기로 오지도 못 하고 국정원에 잡혀 갔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줄 알아라."
"그렇게 따지면 형이 저를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쫓겨 올 일도 없었죠."
"너도 이 일 재미있어 했잖냐?"
"하긴 좀 그러긴 했죠. 이런 일이었으면 진작 얘기해 주지 왜 그동안 숨겼어요?"
"아직 그럴 만한 때가 안 돼서 그런 거지. 아직 니가 이 일의 목적을 알고도 계속 할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은 상태였고."
"그런가요? 그래도 형이 여기 있으니까 처음 왔는데도 이 장소가 그렇게 어색하진 않네요."
"당연한 거 아니냐? 나의 넓은 포용력이 여기를 모두 감싸 안고 있으니 불편할 리가 있겠냐? 여기 온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너도 한 번 안아 줄께. 이리 와 봐라."
"에이 징그럽게 무슨 포옹이예요. 가서 형 좋아한다는 여자들이나 실컷 안아 주세요."
"그래야 되는데 교수님이 오늘은 너 챙겨 줘야 하니까 여기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적응 다 했으니까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얼른 다녀 오세요."
"안 된다. 교수님한테 혼난다."

앤더슨이 벙커에 처음 온 기념으로 둘은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하지 못 했던 마음속 이야기들을 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슬슬 졸음이 밀려 왔고 블랙라이더는 앤더슨이 지내게 될 방을 안내해 주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널찍한 방에 침대와 옷장, 책상이 있었는데 침대의 베개와 이불들은 호텔처럼 하얀 천으로 싸여 있어 마치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었다. 앤더슨은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 준비되어 있는 세면도구로 씻은 후에 옷장을 여니 잠옷이 있어 꺼내 입고 침대에 누웠다. 낯선 곳에서 누우니 처음에는 잠이 오질 않았지만 도망 다니느라 피로가 쌓여서인지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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