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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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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inefabula 2016. 8. 13.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김진혁 대리가 출근해서 머그컵에 커피 한 잔을 타 가지고 자리에 앉아서 향을 음미한 후에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리추얼을 방해받아서 짜증이 나긴 했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OA팀입니다."

"인사팀 이혜진이라고 하는데요. 제 컴퓨터가 이상한 것 같아서 좀 봐 주셨으면 하는데요."

"무슨 문제가 있으세요?"

"컴퓨터를 켰는데 마우스를 아무리 움직여도 화면에서 마우스 화살표가 움직이지 않아요."

"키보드는 입력이 잘 되시구요?"

"네. 다른 건 잘 되는데 마우스만 안 되요."

"제가 가 봐야 될 것 같네요. 자리가 어디세요?"

"10층 남쪽문으로 들어오시면 바로 앞 통로에서 안쪽으로 두번째 자리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사실 김진혁은 이혜진의 자리를 알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상습적으로 컴퓨터에 문제가 있다고 전화를 자주 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김진혁을 좋아하는 듯한 느낌이 있기도 해서다. 그녀가 얼굴도 하얗고 귀여운 편이며 몸매도 착하고 성격도 사근사근한 편이라 그도 이렇게 자주 불려 가는 게 그다지 귀찮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려서 자리를 찾는 척하며 두리번거리다가 그녀의 자리로 갔다.

"매번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왜 이렇게 제 컴퓨터는 말썽인지. 이 커피라도 한 잔 드세요. 예가체프 원두를 제가 직접 드립한 건데. 향이 정말 좋아요."

그녀의 설명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커피쪽에 가까워지자 좋은 향이 느껴졌다. 근데 이건 컴퓨터를 고쳐 달라는 건지, 커피를 마시자는 건지. 어쨌든 업무는 해야 하니까.

"향이 좋네요. 얼른 일 마치고 마실께요." 하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거 무선 마우스네요. 혹시 배터리는 확인해 보셨어요?"

"그거 배터리 넣는 거였어요? 지난번에 샀을 때 김대리님이 설치해 주셨었잖아요. 배터리 넣어야 되는 건 생각을 못 했네요."

"여기 배터리 있으니까 이걸로 한 번 바꿔 볼께요."

배터리를 바꾸니 마우스가 바로 잘 작동했다.

"어머 잘 되네요. 고맙습니다. 김진혁 대리님"

"아니예요. 제가 원래 하는 일인데요. 커피 잘 마실께요."

향기로운 커피를 들고 고맙다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오는 그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에 자리로 돌아왔다.


이 아가씨는 분명히 그에게 마음이 있고 그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만, 숨겨야 할 일이 많은 직업을 갖고 있어서 연애를 시작하기는 좀 곤란하다.

사실 그의 주업은 따로 있다.

아침에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하는 컴퓨터 유지보수는 남들이나 부모님에게 정상적인 삶을 사는 걸로 보이기 위한 위장직업이고, 본업은 의뢰를 받아 사람을 찾아 주는 일이다.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흥신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던 대학시절부터 해킹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데이터를 유출시키거나 뭔가를 망가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학교성적은 좋아서 장학금도 받아서 남들이 보기엔 공부 열심히 하는 착실한 학생의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었다. 자신도 남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해킹도 그냥 실력확인용 정도일 뿐이지 해를 끼치거나 크게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우수한 성적 덕분인지 졸업과 동시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회사가 컴퓨터로 하는 일이라곤 문서작성과 인터넷 뿐이라는 것이다. 컴퓨터공학도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할 만한 일이 없으니 들어가게 된 부서가 바로 컴퓨터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OA팀이었다. 처음에는 컴퓨터공학과 장학생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함께 졸업한 동기들이 입사하자마자 업무와 야근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것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위안을 삼곤 했다.


그렇게 3개월 정도가 흐른 후에 위기가 찾아왔다. 출근해서 별일 없이 하루종일 빈둥대다 퇴근하는 것도 지겹고, 무엇보다도 어처구니 없는 지원 요청을 받는 것이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지원 요청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컴퓨터의 전원 케이블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다고 하거나, 마이크 꽂는 곳에 이어폰을 꽂아 놓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가뭄에 단비처럼 인사팀 이혜진씨처럼 귀여운 아가씨가 불러 줄 때는 뭔지 모를 설렘 같은 것이 몇 시간씩 지속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의심될 정도로 짜증이 나곤 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친구분들이나 친척분들을 만나기만 하면 목에 힘 주고 좋은 회사 들어갔다고 자랑하는 아들인데, 들어간지 몇 달 만에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도 죄송스럽기도 했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한가하고 월급도 많이 받는 이 회사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료함과 짜증을 떨쳐내 줄 무언가를 찾기 여기저기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진동호회에 가입해서 사람들과 다니며 DSLR로 사진 찍기에 몰두했다. 동호회원들과 경쟁심이 생겨 이것저것 카메라 렌즈를 사느라고 한동안 월급이 남아 나질 않았다. 그렇게 1년 정도 열심히 사진 찍기를 가장한 카메라 렌즈 구매 취미생활이 지겨워질 즈음, 싸이클 붐이 일었다. 그래서, 싸이클 동호회에 가입했다. 이번에도 시작은 보통 동호회원들이 타는 수준으로 싸이클을 장만했다. 그런데, 회원들이 하나둘씩 안장과 페달, 바퀴 등을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그도 부러운 마음에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했지만, 몇 백 만원씩이나 하는 부품들도 교체하는 일부 회원들은 그의 월급으로는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돈 많은 회원들을 부러워하고 있던 중에 회원 중에 블랙라이더 형이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앤더썬, 너 컴퓨터 도사라며?"

그의 동호회 닉네임은 앤더슨인데 블랙라이더는 경상도 출신이라서 발음이 안 되어 매번 앤더썬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네? 도사는 아니고 그냥 남들보다 좀 잘 할 뿐이죠."

"너 컴퓨터로 사람도 찾을 수 있냐? 누가 부탁을 하는데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실종 같은 거라면 경찰에 요청하면 되지 않아요?"

"경찰에 얘기했는데 단순가출이라고 접수도 안 해 준대. 그 양반 돈 좀 있어. 찾아 주기만 하면 돈 많이 준다고 했어. 너도 돈 생기면 싸이클 업그레이드 좀 해야지."

싸이클이라는 말에 그만 마음이 혹하고 말았다.

"그래요? 그럼 찾으려는 사람 인적사항 좀 보내 주세요."

"그렇지. 생각 잘 했다. 내가 이따 문자로 쏴 줄께."

이 때가 그의 따분한 직업이 부업으로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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