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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첫 만남

by romainefabula 2021. 7. 17.

20대 후반부터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열심히 연애도 하고 소개팅도 나갔다. 몇 년 동안 열심히 만나고 사귀어 보기도 했지만 매번 결혼을 해도 되겠다는 상대가 없었다. 긴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게 되자 '참 결혼이라는 것이 노력으로는 어려운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결혼한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당시는 결혼 적령기라고 불리는 나이여서 소개팅 기회도 많이 생겼는데, 거의 1~2주에 한 번은 만났던 것 같다. 조금만 지나면 노총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대부분 1번 만나서 괜찮다는 느낌이 없으면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번 소개팅 상대의 사진을 봤는데, 보는 순간 '아, 이 사람과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예뻐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어도, 이 사람과 결혼을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만남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받는 목소리가 활달하고 경쾌했다. 약속 장소는 강남역 스타벅스 앞으로 정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데 약속시간 10분이 지나도록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속으로 '이렇게 약속에 늦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으로 먼 쪽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앞을 봤는데, 사진으로 봤던 그녀가 한 갈래로 땋은 머리에 난처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보면서 '나 좀 먼저 아는 척해 주세요' 하는 느낌으로 서 있었다. 아내에게 왜 먼저 아는 척 안 하고 서 있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소심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내는 무척 소심한 성격이었다. 스스로도 AAA형이라 하고 다녔다. 이제는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나의 뇌피셜이 맞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둘이 말이 잘 통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중간에 나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일어나서 계산하려고 하자, 그녀가 미리 계산을 했다고 얘기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04년 당시에는 소개팅에서 커피와 식사 비용을 보통 남자가 지불했고 매주 소개팅을 하면서 나가는 비용도 꽤 커서, 돈만 많이 들고 결과가 없는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지도 고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먼저 커피값을 지불했으니 더 좋게 느껴졌다.

커피숍에서 나와 소렌토에 가서 함께 파스타를 먹었고, 집에 가기 위해 나섰다. 그녀가 사는 곳이 내가 가는 방향과 같아서 걸어가는데 그녀의 언니에게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는 전화가 와서 배스킨라빈스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포장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내가 아이스크림을 들어주었고, 그녀가 먼저 내릴 때가 되어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하자 그걸 들고 나도 같이 따라 내렸다.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했고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집으로 갔다.

그녀를 글로 표현해 보면, 사랑 많이 받고 자란 부잣집 막내딸 느낌이다. 누구에게나 거침 없이 밝고 상냥하게 대해서 처음 본 사람도 친근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갖게 할지 아는 것 같다. 나는 그것과 상반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성격을 부러워했고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성격이 가끔 못되게 구는 사람들에게조차 강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상냥하게 보이기 위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함께 살면서 알게 되었다. 이런 성격이 암에 걸리는 사람들의 성격에 포함된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탓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나도 가끔 내가 아내에게 못되게 굴어서 아내가 암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완전히 그렇진 않아도 일부는 영향이 있었으리라. 앞으로도 내 탓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나올 예정이다.

 

프롤로그를 쓰면서 마음 속에 눌러 놓아서 잊히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던 아내의 기억이 많이 올라온 느낌이다. 1년 정도 꿈에 안 나오던 아내가 얼마 전 낮잠 자는데 나타났다. 전에는 꿈에 나타나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이번에는 생동감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나고 나서 잘 때 이를 심하게 갈다 보니 이가 아파서 마우스피스를 끼고 잤다. 그 후로는 괜찮았는데 다시 이를 강하게 가는 버릇이 생겼는지 마우스피스를 끼고 자는데도 이가 아프다. 글을 그만 쓸까 고민하다가, 기왕 시작한 거 쓰다 보면 적응되겠지 하는 마음에 계속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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