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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재발

by romainefabula 2022. 1. 17.

수술이 끝나고 회복된 후에는 행복한 날들만 계속되었다. 아프기 전처럼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외식도 했다. 항암치료가 끝났기 때문에 아내의 머리는 다시 자라기 시작했는데 짧은 스포츠머리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다듬어 가며 길렀다. 수술 후 몇 달 안 되는 기간 동안 그전까지 해 보지 못 한 새로운 경험도 몇 번 했다. 이것들이 마치 회복을 축하한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첫 번째는 '김제동의 톡투유'라는 프로그램에 응모했는데 뽑혀서 방청하게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멜론에서 응모한 복면가왕 방청이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톡투유는 녹화시간이 4시간 정도 되었는데 김제동의 진행이 재미있긴 했지만 한 번도 안 쉬고 내리 해서 너무나 힘들었다. 복면가왕은 내가 파일럿부터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모두 볼 정도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했고, 내가 간 녹화가 그 유명한 음악대장이 출연했던 때이고 부른 노래는 음악대장이 부른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매일매일 기다려'를 불렀던 때여서 더 감동적이었다. 한 번에 2주분을 한꺼번에 찍기 때문에 총 녹화시간이 9시간 정도지만, 한 시간에 10분씩 휴식시간도 있고 저녁시간도 있고 해서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때 가수 양파가 가왕전에 올랐는데 3라운드까지 워낙 노래를 잘해서 가왕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음악대장은 처음 한 소절만으로 자신이 가왕임을 입증해 냈고, 방청객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집에서 복면가왕의 '매일매일 기다려' 음원을 들을 때마다 아이에게 여기 엄마, 아빠 목소리 있으니까 잘 들어 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수술 후 3~4개월이 지난 시점에 검사가 있었다. 검사를 받고 나온 아내의 표정이 좀 심각했다. 초음파 검사 중에 뭔가가 보여서 의사가 자세하게 다시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놀랐지만 별 일 아니길 바라면서 의사 진료시간을 기다렸다. 진료실에 들어가니까 의사가 반갑게 인사하면서 이제 행복한 시간만 남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검사 결과에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잠시 후 검사 결과를 보던 의사의 표정이 심각해지도 재발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고, 의사는 검사 결과를 제대로 못 봐서 미안하다며 힘내서 다시 치료해 보자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얼른 항암 치료하고 수술하면 끝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유방암에는 대강 4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2가지는 여성이 폐경 전과 후에 나오는 각기 다른 여성호르몬(에스트로겐과 또 다른 하나)에 의한 것이고, 세번째는 HER-2라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가 3중 음성인데, 아마도 여성호르몬에 의한 것 2개와 HER-2에 모두 해당하지 않으면 3중 음성인 모양이다. 뒤늦게 의사가 얘기해 준 바로는 3중 음성이 생존기간도 짧은 편이고 항암제도 많지 않아서 안 좋은 케이스라고 한다. 평균 생존기간이 18개월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에 비하면 아내는 힘든 싸움을 참 오래 버텨 주었다.

재발 후엔 다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수술 전에 사용하던 항암제에 비하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부작용이 있는 약도 적은 편이고, 가끔 먹는 약도 있어서 치료 받는 건 조금 수월해졌다. 하지만, 매번 짧으면 1달, 길면 3~4개월 정도 항암제를 사용하면 내성이 생겨서 더 이상 암세포가 줄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커지는 문제가 생겼다. 그러면, 또 다른 항암제를 골라서 투약을 다시 시작했다. 항암제의 선택은 결국 의사의 능력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좋은 약으로 오래 치료받을 수 있었다. 건강보험에서 중증환자에게 90% 보험급여를 지급해서 치료비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았다. 돈이 얼마 안 들었다고 나중에 이상한 짓을 벌여 아내를 힘들게 했지만, 의사 선생님과 건강보험에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재발 후에 가장 큰 문제는 전이였다. 처음 발견할 때부터 이미 겨드랑이와 쇄골 쪽에 전이가 되어 있었는데, 재발 후에 작게 여러 군데 전이가 된 상태였다. 한 군데만 생겼으면 수술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곳에 전이가 되어서 의사도 수술 얘기를 안 꺼냈던 것 같다. 수술해도 소용이 없으니 항암치료받으면서 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아 보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실을 미리 얘기하면 삶의 의지가 꺾여 금방 죽을 수도 있으니까. 암이라는 병에서 오래 살아남거나 완치하려면 반드시 강한 삶의 의지가 필요한 것 같다. 어떤 아는 분이 배가 계속 나오길래 혹시나 해서 검사를 받았는데 암 때문에 복수가 차서 그런 거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는데도 살려는 의지가 별로 없으셨는지 눈빛이 흐려지셨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니 이 분도 참 착하고 순수한 분이셨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가 있어서인지 정말 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학교에서 학부모 활동도 하고 아이 교육을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심히 움직였다. 너무 멀쩡히 열심히 다녀서 사람들은 아내가 별로 아프지 않고 계속 이 상태로 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투병 시작 후 2년반쯤 지나면서 이렇게 항암치료로 버티다가 더 이상 치료가 안 되면 죽게 되는가 보다 하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깨어있는 시간 중에 특별한 생각이 없을 때는 항상 아내를 완치시켜 달라고 기원하고 성당에 가서도 계속 기도했다. 하지만, 아내가 머지않아 죽게 될 거라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아이가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암의 진행속도가 조금 빨라지자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한 달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너무나 건강해 보인 것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이 거의 완치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것이다. 시댁이 문제였다. 어딜 가나 예쁨 받는 행동만 해서 시부모님한테 미움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시댁에 가거나 명절에 큰아버지댁에 가면 음식 준비나 설거지를 해야 했다. 아내는 수술하면서 림프액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서 오른쪽 팔이 자꾸 붓게 되어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붕대를 감고 다녔다. 이것도 계속하면 안 돼서 매일 한두 번씩 네댓 가지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 반복해야 했다. 덕분에 내가 붕대 감는 도사가 되긴 했다. 그런데, 이 팔을 한 며느리에게 자꾸 집안일을 시키니 사정을 아는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집에서도 불편할까 봐 장모님이나 내가 집안일을 다 해 주고 있는데, 아픈 사람이 가서 일을 하다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마다 상체 쇄골과 어깨 주변에 조그맣게 전이된 암세포들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아내는 큰 불편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조금이라도 더 살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고 아이를 돌봤다. 아내의 투병생활 동안 나의 모든 생활과 생각은 아내를 위해 맞춰져 있었다. 기도하고 성당에 다니는 것 외에도 나의 외모와 건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만을 원했다. 그러다가, 내가 한 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안방에서 앉았다가 일어나는데 갑자기 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어지러웠다. 쓰러질 것 같아서 벽을 등에 대고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났다. 내가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말에 괜찮다고 하면서 벌떡 일어났는데 이마가 아프고 오른쪽 어깨가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엎드려 있었는지는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아마도 벽에 기대 있다가 오른쪽으로 넘어지면서 문고리에 어깨를 부딪히고 앞으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방바닥에 찧은 모양이다. 쿵 하는 소리가 나고 무슨 일인가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는데 내가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자신 때문에 남편의 건강까지 나빠진 게 아닌가 하고 자책하지 않았길 바랬다.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그 후에 암세포가 빠르게 자란 걸 보면 마음 착한 아내가 자책하면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아직도 한다. 내가 건강관리를 잘했으면 더 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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