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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점점 마지막으로

by romainefabula 2022. 1. 17.

프로젝트 일이 바빠서 몇 달 동안 아내가 병원에 갈 때 함께 가지 못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기도가 좁아져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입원 준비를 해서 병원으로 함께 갔다. 하지만, 이후에 아내는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서 기도에 관을 꽂고 목 쪽으로 구멍을 내서 거기로 숨을 쉬도록 하는 수술이라고 했다. 잘 되면 관을 빼고 다시 입과 코로 숨을 쉴 수도 있다고 했고, 대신 입으로 숨을 쉴 수 없으니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관은 끝까지 빼지 못했고 아내의 목소리도 다시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솔톤의 맑고 깨끗한 아내의 목소리를 참 좋아해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졸리면 전화해서 잠 좀 깨게 해 달라고 얘기하곤 했었다. 그렇게 목소리를 더 못 듣게 될 줄 알았으면 아이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녹음이라도 해 놓을 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 몇 달 사이 마지막인 것이 너무 많았다.

기도에 관을 꽂는 수술을 하러 수술실에 들어가는 모습도 또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는 큰 수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수술실로 들여보내는 일은 항상 마음이 무겁다. 수술이 끝나고 나온 후부터는 아내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입모양으로 의사소통을 하다가 결국 스케치북에 네임펜으로 글을 써서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이 힘들어지니 답답해서인지 짜증 내는 일도 많았다. 엄마가 없어 불안할 수 있는 아이를 장모님에게 맡길 수 없어서 나는 집에서 아이를 챙겨야 했고, 병원에서 아내를 도와줄 간병인을 급하게 찾았다. 소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분이 끝까지 아내를 마음 편하게 챙겨 주셨으니 아내가 인복은 있는 모양이다. 남편복이 없었던 건 아닌지...

이후로는 아내를 비롯해 간병인, 가족 모두가 지금까지의 투병생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목에 꽂은 관에는 몇 시간 단위로 기계로 약품을 분무 형태로 불어넣어 줘야 했고, 중간에 마르지 않게 식염수를 넣어 주기도 해야 했다. 관에 가래가 차서 막히면 질식사할 수 있기 때문에 잘 관찰하고 있다가 아내가 숨쉬기 불편하다고 하면 목에 고무로 만든 끝에 구멍이 있는 막대를 꽂아서 수시로 가래를 뽑아 주어야 했다. 간호사에게 요청하면 해 주긴 했지만 자주 부탁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혹시 신경을 못 쓰다가 가래로 관이 막힐까 봐 간병인과 가족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가래를 뽑은 후에 목의 관에 꽂은 호스와 가래가 담긴 통은 매번 세척해 줘야 했다.

관을 꽂은 후에는 당분간 큰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그 후에는 더 이상 입원할 수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이때 이미 큰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했고, 이 경우에는 더 이상 입원을 하지 못 하게 하고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하기에 집 근처에 있는 요양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요양병원은 기력이 거의 다 한 노인분들이 마지막을 맞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목에 관을 꽂아 관리가 힘들고 정신이 말짱한 젊은 사람은 있기 힘들 거라고 상담직원이 이야기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기에 뭔가 다른 치료방법이 없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암 요양병원이라는 곳을 찾았다. 일반적인 병원 치료가 아닌 여러 가지 민간요법 같은 것을 시행하고, 편하게 쉬면서 건강한 식단을 제공받으면서 있는 곳이라고 했다. 보통 실비보험에 가입한 암환자들이 수술 후나 항암치료를 받으며 입원하는 곳인데, 한 달 입원비가 몇백만 원이니까 실비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환자들에겐 굉장히 경제적 부담이 큰 곳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치료기간 동안 90%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치료를 받아서 돈이 많이 들지 않아서, 내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여기에서의 치료가 극적인 효과가 있어 아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몇억이 들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암 요양병원으로 옮긴다는 얘기에 큰 병원의 의사는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적극적으로 말렸다. 의사는 많은 경험으로 효과도 없이 돈만 날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랬던 것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마지막으로 걸어 볼 수 있는 희망 같은 거였다. 하지만, 내 욕심은 아내를 더 힘들게만 했다. 거동이 편하고 식사도 무리 없이 가능한 환자라면 괜찮지만, 목에 관을 꽂고 수시로 가래를 뽑아야 하고 식사도 불가능한 아내는 이런 환자를 케어할 준비가 잘 안 되어 있는 암 요양병원에서 엄청난 불편을 겪었다. 며칠 만에 나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사설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 근처의 작은 병원으로 옮겨서 입원 수속을 하고 검사를 하고 들어갔는데, 그 병원의 과장이 치료가 불가능해서 못 받겠다고 나가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만에 다시 다른 병원을 찾아 사설 구급차를 불러 옮겨야 했다. 그 짧은 사이에 아내의 목에 꽂은 관과 바깥 호스를 연결하는 연결부가 빠지지 않아 큰 병원 응급실로 가서 힘센 남자 간호사들이 모두 달려들어 겨우 빼고 다시 돌아오는 사건도 있었다. 이 병원에서 받아 주진 않았지만 응급실이나 입원실의 간호사와 직원들이 참 친절해서 감사했는데 코로나 뉴스에 몇 번 이름이 나올 때마다 반가웠다.

다시 옮긴 병원에서도 입원 전에 검사와 수속을 하고 입원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서도 같은 생활을 반복했지만 중간에 몇 번 큰일이 있었다. 아내가 목의 관이 답답하다고 해서 두 번인가 급하게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큰 병원의 응급실로 갔었다. 한 번은 목에 꽂은 관을 바꿨고 그 외는 간단한 치료만 받았는데, 문제는 직전에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병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강보험에서 같은 날 두 곳의 병원에 있을 수 없다는 뭐 그런 설명을 들은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큰 병원의 응급실로 가기 전엔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퇴원수속을 해야 했다. 그럼, 큰 병원 응급실에 갈 때마다 새로운 병원을 찾고 준비해서 옮겨야 한다는 것인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만도 환자는 힘든데, 옮길 때마다 환자도 힘들고 짐을 싸고 옮겨야 한다는 것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한 가지 병원에서 방법을 알려 준 것은 큰 병원의 응급실에 갔다가 밤 12시가 넘으면 원래 있던 작은 병원으로 다시 가서 입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짐은 차에 넣었다가 다시 올려야 했지만 매번 새로운 병원의 환경에 적응할 필요 없이 같은 병원의 같은 병실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면서 한 달가량을 지냈다. 사실 이 병원에서도 과장이 가망 없는 환자를 계속 받기를 꺼려했지만, 장인어른이 다른 곳으로 옮겨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여기서 있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한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도 아내를 잘 돌봐 줘서 고마웠다.

이렇게 목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지 못 하자 아내는 많이 불안해했다. 암이 더 빨리 퍼지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항암치료를 하지 못 하는 동안 암이 더 빠르게 진행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꽤 오랫동안 버텨 오던 아내가 목에 관을 꽂을 때부터 항암치료를 멈추고 두 달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으니까. 아마도 말기였을 텐데, 이때는 통증도 엄청났던 것 같다. 마지막 두 달 동안 통증이 시작되면 아내는 고통스러워서 웅크린 채로 꼼짝도 못 했다. 먹는 진통제를 먹어도 이 약이 흡수될 때까지는 그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애가 탔다. 그러다가 목에 관을 꽂고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수액 라인에 주사로 진통제를 넣기 시작했다. 이것도 고통을 막아내지 못하게 되자 마지막에는 마약성 진통제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아내는 중독이 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으나, 아파서 죽게 생겼는데 중독이고 뭐고 따질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주사로 넣는 마약성 진통제는 통증을 금방 잠재워 주었고 그 진통제만 맞으면 고통이 금방 사라지고 편안해 보였다. 아내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한 번은 큰 병원 응급실에 가서 치료받고 있는데 의사가 오더니 연명치료 계획서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 설명을 들어 보니 연명치료라는 것이 환자의 의식과 호흡이 사라지는 순간 호흡기에 관을 꽂아서 강제로 숨 쉬게 해서 심장이 멈출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고, 이 연명치료를 포기하면 다른 치료를 하다가 숨과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그대로 둔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연명치료를 하더라도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을 보기 흉하게 살려 두는 것 같아서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문제는 이 연명치료 포기를 보호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환자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명치료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의 호흡이 멈추게 되면 의사는 연명치료를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 어려운 일이 던져졌다. 환자에게 가서 당신이 숨 넘어갈 때 죽게 놔둬야 한다고 설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아내에게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남편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고심한 끝에 아내에게 가서 설명을 하고 연명치료를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내는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는 듯 선뜻 포기하겠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자신이 얼마 가지 않아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연명치료에 관한 것도 생각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자 준비를 해야 했다. 떠나기 전에 아이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해 주겠다고 하자 아내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은 글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미리 적어 둔 모양이었다. 그 내용을 내 스마트폰으로 문자로 보내서 잘 저장해 두었다가 엄마가 떠난 후에 아이에게 보여 주었다. 한 가지 서운한 것은 나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함께 한 하나밖에 없는 남편인데 왜 나에게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있다. 왜 그랬는지 의도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있긴 하다. 아내의 임종을 기다리며 간병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자신이 떠난 후의 나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남편은 다른 사람 만나서 잘 살겠지요'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물론 글로 썼겠지만. 얼마 전에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님도 암수술받기 전에 남편에게 다른 여자 만나서 잘 살라고 했다고 하셨다는데 아내들은 다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는 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아직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또 만났다가 또 아파서 아내가 투병하는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을 다시 할까 봐 두려워서 아직까지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할 엄두도 못 내는 내 입장에서는 아주 억울하다. 지금 생각은 또 그런 힘든 일을 겪을까 봐 두려워 다시 태어나기도 싫다. 그냥 하늘나라에 가면 아내를 다시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물론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 앞으로 계속 그럴 거라는 장담은 못 하겠지만, 내 성격상 결혼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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