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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들

by romainefabula 2022. 1. 28.

아내가 암으로 투병하는 동안에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스케치북에 쓴 글이 있다.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은 사람들이 고생이지"

아직 아내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던 나는 이 글을 보고 깜짝 놀라서 뭔가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했는데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어버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았을까 고민해 보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내가 떠나고 이 말이 아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서 했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정확한 예언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참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아이는 엄마가 없는 삶을 꿋꿋하게 버티고 있고, 나는 혼자서 일하고 집안일하고 아이 키우며 살고 있다. 이렇게 3가지로 적어 놓으니까 간단해 보이는데 실제로 하는 일을 따져 보면 웬만한 인간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보다 정확한 비유를 찾아보자면, 직장 다니며 돈 벌어 오는 아빠가 하는 일과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엄마의 일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아내가 아이를 손 많이 가는 초등학교까지는 키워 주어서 덜 힘들고, 아이도 사춘기치곤 순둥순둥 한 성격이라서 신경을 좀 덜 쓴다는 게 다행이다.

집안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전제품을 최대로 사서 이용하고 있다. 세탁기, 건조기, 스타일러,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까지 사서 최대한 사용하고 있다. 직접 살림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로봇청소기가 있다고 항상 집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부지런히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통을 비우고 물걸레를 빨아 줘야 집안이 깨끗하다. 식기세척기도 음식을 안 해 먹으면 사용할 일이 없다. 하지만, 아이에게 인스턴트음식과 배달음식만 먹일 수는 없으니 되도록 이것저것 아이 입맛에 맞는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이려고 노력하다 보니, 하루에 한 번은 식기세척기를 꽉 채워서 돌릴 만큼 설거지거리가 나오고 있다. 뭐든 아내의 빈자리가 표시 나지 않게 하려고 가전제품의 도움을 받으면서 몸으로 때우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훌륭한 가전제품을 만들어 준 LG전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 한 가지 나를 고생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람들이 시선이다. 동네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 모두 아내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면서 내 모습을 볼 것이다. 내 사정을 알 테니까 보통은 안쓰러운 마음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주 즐겁거나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모두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아내가 죽었는데 행복하게 잘 지내네'하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사람은 잠깐 보이는 모습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기 마련이고, 나도 힘든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서, 동네 돌아다니기가 두렵고 가능하면 행복한 표정은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루 24시간 우울한 상태로 있는 사람은 언제 자살할지 모른다. 아무리 힘든 사람도 가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 지금 사는 동네를 벗어나고 싶은데 아이 학교 때문에 이사를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동네도 그렇지만 아내가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것도 힘들다. '구해줘 홈즈'라는 프로그램에서 남편이 죽은지 얼마 안 된  아내와 자식들이 새로 살 집을 찾아 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100% 이해한다. 지금 사는 집은 온통 아내와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14년 넘게 옆에서 아내가 자던 그 침대에서 매일 잠을 자고 있다. 가끔은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살아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내가 죽을 때까지 나의 머릿속에서 아내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적당해야 하는데 지금은 조금 과한 것 같다. 그나마 조금씩 덜해지는 느낌이라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아이가 빨리 학교를 마쳐서 동네를 떠났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하다.

나는 그 불쌍하다는 애 딸린 홀아비다. 불쌍한 처지인 것은 맞지만 불쌍해 보이고 싶진 않다. 원래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편이긴 했지만 불쌍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옷차림이나 외모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아이도 깔끔하게 하고 다니게 하려고 공부 잔소리보다 씻으라는 잔소리를 더 많이 하고, 옷도 잘 사서 입히고 있다. 냄새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홀아비지만 홀아비 냄새가 나는 건 싫어서 빨래할 때 냄새 제거가 잘 되는 세제를 쓰고, 외출할 때는 향수도 뿌리고, 집안에는 디퓨저를 놓아서 나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물론, 남들 신경 쓸 필요 없이 편하게 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데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나를 버티고 살게 하는 것은 자존심과 자존감이다. 이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내 삶도 무너지기 때문에 꼭 지켜내야 한다.

마음 편하게 살려면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이사를 가는 것이 좋겠지만 이것은 내가 원한다고 앞당길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현재 생활에서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돈 버는 일을 안 하려고 매주 조금씩 복권을 사고 있다. 돈이 많으면 밥벌이 걱정할 필요 없이 집안일하고 아이만 챙기면 되니까. 사실 확률상 죽을 때까지도 당첨이 안 될 가능성이 훨씬 높긴 하지만, 매주 이런 희망이라도 가지고 살면 일주일을 버텨 내기가 조금은 편해지는 느낌이다. 조금 더 희망적인 삶을 위해서 연금복권과 로또 두 가지를 매주 사고 있다. 목요일에 안 되면 토요일을 기대하고, 토요일도 안 되면 그다음 목요일을 기대하고.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확률이 0인 것도 아니고, 매주 당첨자가 나오는데 그게 절대로 내가 아니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불쌍해서라도 한 번 당첨시켜 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당첨되면 좋겠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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