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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명절

by romainefabula 2022. 2. 6.

홀아비가 되고 나니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부럽다. 단, 둘이 서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부부 사이가 좋거나 아니면 서로 얘기도 거의 안 하고 셰어하우스의 메이트 정도의 관계라도 최소한 가끔 안부는 묻고 집안일을 단 10%라도 나눠서 할 순 있으니까. 사실 나 말고 누군가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길 가다가 가장 부러운 부부는 손 잡고 걸어가는 부부이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자주 손 잡고 걸어 다니기도 했고 예전에 내 꿈이 나이 들어서 아내와 손 잡고 산책 다니는 거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1년에 딱 두 번 다른 부부들이 전혀 부럽지 않은 날이 있다. 제목에도 있듯이 명절에는 전혀 안 부럽다. 그만큼 그동안 명절이 지옥 같았다는 뜻이다. 씨발 좇같은 시댁. 시댁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좋다는 며느리는 아마 전생에 나라를 3번은 구한 사람일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집안 욕이라서 이런 공개된 곳에 적기는 그렇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명절에 큰아버지 집에 가는 걸 안 좋아했다. 놀 또래 친구도 없는데 산더미 같은 재료를 앞에 두고 송편, 만두 만드느라 허리도 아팠다. 그나마 그걸 다 만들고 나면 할 일이 없어 작은방 구석에 처박혀서 멍하게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내 차가 생기면서부터 명절 당일 아침 일찍 갔다가 성묘가 끝나자마자 도망 왔다.

결혼하고 아내에게 며느리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기면서부터 다시 그 악몽 같은 명절 지옥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명절에 그렇게 모범적으로 일했던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시간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아내가 아프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암 투병 중일 때에도 잠깐씩이라도 일을 했다.

아내가 떠나고 난 후 첫 번째 맞은 설날에 아이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명절마다 아이와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이탈리아 여행 직후부터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퍼져서 해외여행을 더 가진 못 했다. 그래도 한 번도 큰아버지 집에 가진 않았다. 이후 명절엔 국내여행이라도 다니고 있다. 아마 집안 어른들은 우리를 걱정할 수도 있고 욕할 수도 있다.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욕하는 것에 너무 신경 쓰면서 살 여력이 없다. 사람들이 욕하는 것은 가뿐하게 반사시키고 꼴리는 대로 살아야 한다. 단,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도에서.

힘든 시기에 가장 위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가족이고, 그와 반대로 가장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사람도 가족이다. 요즘 자주 나오는 얘기가,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력해서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안 보고 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직장에 있으면 다른 부서로 옮기던지, 그것도 안 되면 퇴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은 혈연이라서 호적까지 연결되니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족은 좀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요구사항을 확실히 전달하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안 보고 살 수도 있어야 한다. 힘들 땐 마음 독하게 먹고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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