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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살아내기

by romainefabula 2022. 2. 13.

아내가 암에 걸리기 전까지 내 인생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태어난 김에 사는 느낌이었다. 때가 되면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고, 군대에 가고, 취직하고, 아내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아이도 생겼다. 모든 것이 누구나 아는 방식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삶의 목표나 무언가를 이루고 싶거나 하는 것도 딱히 없었다.

삶의 목표가 없는 것이 대학 시절에 도를 닦는 사람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를 아십니까'류의 사람들이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는데 대답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무언가 답을 알려 주지 않을까 해서 따라가서 몇십만 원의 제사비용 같은 것을 내고 제사 비슷한 것도 지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만나면 하는 얘기가 이상한 종교적인 것이었고 내가 원하는 답은 주질 않았다. 애초에 나에게 인생의 길이나 목표를 가르쳐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젊은 시절에는 부모나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뭔가 되어 보려고 노력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멀려 나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 열심히 버티고 노년이 되면 남은 인생을 즐기다가 가는 것이지. 삶의 목표를 묻는 사람들은 애초에 답이 없는 질문을 던져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아내가 암에 걸린 후에는 아내를 살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고, 아내가 떠난 후에는 아이를 잘 키우고 큰 후에는 가끔 보면서 도와주거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전에는 인생이 즐겁기도 하고 가끔 힘들기도 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재미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별 노력 없이 살아지던 인생이 열심히 살아내야 살아지는 것이 되었다. 가끔씩 발을 굴러주기만 해도 잘 굴러가는 전기자전거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굴러주지 않으면 멈춰 버리는 완전수동자전거가 되었다.

아내가 떠나고 나의 삶에 무게가 더해졌다. 아이에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아이는 고아가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소주 한두잔 정도만 마신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기도 했지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에 안 좋은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다. 그 외에도 최소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항상 신경을 쓴다.

아내가 떠난 후에 아이도 불안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말에 가끔 점심을 먹고 졸음이 와서 낮잠을 자는데 아이가 와서 몇번 깨운 적이 있다. 내가 깨어나서 뭐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별 이유가 없는 듯했다. 아마 아빠가 죽은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깨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혼자 남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것이 싫고, 내가 아플 때 간병하느라 몸과 마음이 고생할까 봐 걱정이 되어 나는 항상 건강을 아주 좋은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죽을 때 아빠가 일찍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을 만큼만 충분히 오래 살고 싶고, 내가 죽기 전에 아이가 간병하느라 고생하지 않도록 짧게만 아팠으면 좋겠다.

돈을 벌기 위해 일도 해야 하고, 아이 공부와 학교생활도 챙겨야 하고, 집안의 청소와 요리도 해야 한다. 2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적은 노력으로 빨리 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걱정하던 부분이 안정되어 가는데 다른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아이가 학원에 가 있는 시간이 문제다. 혼자 아무도 없는 집안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미치도록 외롭고 허전하다. 아내가 있을 때는 같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방에 들어가 다른 일을 하더라도 혼자가 아니라서 허전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으면 정말 허전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처음엔 넷플릭스나 웨이브에 가입해서 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끊임없이 보았다. 한동안은 시간 날 때마다 발효빵을 만들었다. 요즘은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블로그에 쏟아내고 있다. 누구에게도 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요즘은 책읽기에 꽂혀서 시간 날 때마다 읽고 있는데 이 책을 다 읽으면 기술 관련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할 것 같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은퇴를 하고 아이가 독립하면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긴 하루를 보내려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루틴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원래 이런 루틴 중의 하나로 드립 커피를 생각해 뒀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드립 커피를 시작했다. 실망스러운 것은 드립 커피를 만드는 데 걸리는 총시간이 10분이 안 되는 것이고, 놀라운 것은 드립 커피의 향이 지금까지 먹었던 모든 아메리카노 맛을 잊을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드립 커피를 만드는 데 시간이 적게 걸려서 실망스러운 이유는 긴 하루 시간을 때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루틴들이 필요한데 10분밖에 안 걸리면 뭘로 남은 시간을 채워야 하나 걱정이 되어서다. 돈 안 들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루틴을 앞으로도 열심히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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