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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떠난 사람, 남겨진 사람

보험금

by romainefabula 2023. 6. 4.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모든 상속처리는 끝냈는데 암보험 사망처리는 3년 반이 넘도록 안 한 채로 놔두고 있었다. 딱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귀찮기도 하고 보험금 청구할 때 제출하는 서류 중에 사망진단서와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서류에 아내 이름 옆의 '사망'이라는 글자가 보기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보험금 청구가 끝나고 깨닫게 되었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다.

보험사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문의하고 정부24 사이트에 접속해서 필요한 서류를 출력했다. 제적증명서는 온라인 출력이 불가능해서 주민센터에 가서 받았다. 그냥 보험금 수령이 아니고 사망으로 인한 상속자의 보험금 수령이라 모든 상속자들의 서류가 필요해서 꽤 복잡했다. 참, 보험금 청구를 미룬 이유가 하나 더 생각났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사망보장이 없는 보험이라서 보험금이 많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이 많은 서류를 가져가서 5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받는 건 아닌가? 그런 돈 받으려고 이런 걸 해야 하나 생각했었다.

앞의 글을 쓴 지 오래되어서 이 얘기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쓸 것이 하나 있다. 애 딸린 홀아비 생활은 참 고되다. 먹고살려면 일단 일터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 중간에 아이 식사와 옷, 공부도 챙겨야 하고, 학교생활도 신경 써야 하고, 학교와 학원에서 수시로 날아오는 알림을 읽어 보고 그냥 넘어갈지, 응답을 해야 할지, 돈을 내야 할지 챙겨야 한다. 집에 돌아오면 청소, 빨래, 요리도 모두 혼자 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은 아내가 죽었어도 돈이라도 많으면 일하러 안 나가고 집에서 돈이나 쓰면서 집안일하고 아이만 챙기면 될 텐데. 이놈의 일은 끊임없이 있어서 쉴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험이 2개인데 고객센터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날에 따로 갔다. 첫 번째 보험사에서 예상보다 많은 금액을 수령했다. 미루던 보험금 청구를 하게 된 계기가 할 일이 있는데 돈이 살짝 부족해서였는데, 이 보험금으로 해결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두 번째 보험사에 갔다. 여기서도 예상보다 많은 금액을 수령했다. 혹시 이 보험금 타서 부자 되었을 거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얘기하는데 두 개 합쳐서 천만 원도 안 된다. 팔자 고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다.

두 번째 보험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보험금 수령을 미룬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내가 떠나고 휴대폰 번호를 계속 살려 두었다. 그냥 이 번호가 살아 있으면 아내가 조금은 살아 있는 느낌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통신사에서 사망 사실을 알고 번호를 해지하라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보험사는 사망 사실을 모르는지 가끔 알림이 와서 보험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알림을 받을 때마다 얘들은 왜 모르고 귀찮게 자꾸 문자를 보내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보험금을 모두 청구하고 나니 이제 아내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망한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술을 잘 못 마시긴 하지만 거의 완전히 끊은 상태여서 1년에 한두 번 작은 맥주 한 캔 정도 마시는데, 이 날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아내가 진짜 사라진 날이라서 마음이 허전해졌다. 보험금이 많아서 더 슬펐다. 예상보다 많은 액수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필요한 액수만 받았으면 술을 마시고 싶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망보험이 있어서 10억 정도 받았으면 생활은 편해졌을 수 있겠지만, 돈을 쓸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을 것 같다. 아내 목숨값을 쓰면서 어떻게 즐겁겠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세월호가 생각났다. 단원고 아이들 보험금 얘기를 하면서 그 부모님들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을 때 그분들이 얼마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지 가슴깊이 이해되었다. 보험금으로 몇십억을 받았다고 해도 급한 빚은 갚을 수 있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사용할 뿐 그 돈을 건드리고 싶어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사치는 꿈도 꾸지 못 하셨을 것 같다. 내 아들, 딸의 목숨값으로 사치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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